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문단 편집) == 가족 == 크라수스에게 알려진 자식은 장남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기원전 54년 재무관)|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2세]]와 차남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있다. 군재가 부족하다던 크라수스 본인과는 다르게 의외로 장남과 차남 모두 상당한 군재를 보여줬으며, 손자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기원전 30년 집정관)|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3세]]는 일신의 무력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장남 마르쿠스는 내전기까지 살아남았고 카이사르 충성파로 남아 북이탈리아 일대를 다스렸다고 한다. 그는 카이사르 밑에서 재무관을 지냈고 카이사르군의 대대장을 거쳐 사제가 되었다. 차남 푸블리우스는 항목 참조. 크라수스의 아내인 테르툴리아(Tertulla)는 기록이 미비해서 어떤 가문의 출신인지 알기 힘들다. 다만 명문가 출신인 크라수스와 결혼할 정도이면 그녀 역시 명문가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크라수스는 평소 행실이 검소한 것처럼 여자 관계도 깔끔해서 아내인 테르툴리아에게만 충실했다. 손자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기원전 30년 집정관)|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3세]]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2세의 아들로,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안토니우스에게 대적했으며, 옥타비아누스로 불리던 시절의 아우구스투스가 껄끄러워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할 때 그를 도와서 승기를 가져왔다. 기원전 30년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집정관이 될 정도로 명망이 있었던 배경 역시 이런 경력이 큰 역할을 했다. 이후 [[다뉴브 강]] 전선에 참여하여 스키타이족과 전투를 벌였는데, 스키타이족의 데쿠도와 [[일기토]](!)를 벌여 승리를 거둔 전적을 얻었다. 이 전공으로 로마 역사상 단 세 번 밖에 없었던 '[[스폴리아 오피마]]'라는 훈장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견제로 얻지 못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그에게 황제나 황족이 아닌 로마인의 마지막 개선식을 허락하고, '임페라토르,라고 병사들에게 선포받는 것을 허락했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누이가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문과 결혼해 얻은 외조카를 양자로 삼았다. 그 양자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1세는 집정관을 거쳐 히스파니아 총독을 역임했다. '크라수스 4세'로도 불린 그는, 소년 시절부터 외삼촌이자 양부인 크라수스 3세 덕에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을 받았다. 크라수스 4세는 [[티베리우스]] 시대에 집정관을 맡았고, [[칼리굴라]] 시대엔 황제와 그 황숙인 [[클라우디우스 1세]]의 조언자로 존중받았다. 그래서 크라수스 4세는 칼리굴라 암살 이후 즉위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시대에 이르러, 마우레타니아 총독을 역임했고, 브리타니아 원정에 참가하여 개선식때 클라우디우스 1세와 함께 설 정도의 전공을 세웠다. 크라수스 4세의 딸은 리키니아로 그녀의 아들이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세네카]]와 함께 [[네로]] 암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였다. 크라수스 4세는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해, 자녀를 많이 얻었다. 이중 그의 장남은 아주 일찍이 아내의 외할머니인 폼페이아[* 명장 [[폼페이우스]]의 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누나]의 혈연인 이유로, 대가 끊긴 폼페이우스 가문에 입양되었다. 그래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는 아버지 크라수스 4세를 크게 신임한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 후원을 받았고,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공주와 결혼해 클라우디우스 1세의 부마가 되었다. 그러나 부부 사이는 최악이었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이 로마에서 경멸받던 동성애자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공주와 소원했고,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의 남편은 곧 어린 [[브리타니쿠스]]의 보호자이자 후원자인 것과 연관되었기 때문에, 이는 [[발레리아 메살리나]]의 명령으로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해당하고 결혼이 무효가 된 일련의 사태로 끝이 났다. 크라수스 4세의 차남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5세'로도 불린,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2세였다. 그는 [[네로]] 시대에 집정관을 지냈으나 네로에게 처형당했다. 3남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스크리보니아누스도 정계에서 활동했다. 4남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리키아누스는 전술된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양자로 입적되었다가 네로 암살 미수 사건 이후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복귀 후 [[갈바]]의 양자로 입적되어 후계자로 공인되었으나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의 반란으로 함께 살해당했다. 크라수스 프루기 2세의 장남은 보결 집정관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였다. 그는 최소 두 번 결혼했는데, 이중 그가 [[트라야누스]] 황제의 누이의 외손녀와 결혼해 얻은 딸이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였다. 루필리아 파우스티나는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결혼해, 2남 2녀를 얻었는데 이중 3명은 성인까지 살아남았다. 이 세 아이 중 둘째 딸이자 실질적인 장녀가 [[대 파우스티나]]였고, 장남이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2세였으며, 차남이 마르쿠스 안니우스 리보였다. 이중 장녀 대 파우스티나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아내로 훗날 '아우구스타'가 되었고, 자신의 조카를 양자로 입양한 후 사위로 삼았다. 그 조카가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인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아들로 법무관이던 중 요절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2세의 아들이었다. 즉,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딸은 [[대 파우스티나]], 사위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손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녀의 외손녀이자 손녀 며느리는 [[소 파우스티나]]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를 구성한 안토니누스 가문은 서기 3세기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와 그의 두 아들의 비문에서 확인되듯이, 그들의 선조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대 파우스티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생전부터 스스로를 옛 에트루리아에서 기원한 명망가인 크라수스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했다. 리보 프루기의 삼촌은 아버지와 동생 피소 리키니아누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대에 들어 밀고자를 찾아내 원수를 갚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리보 프루기의 동생들은 공화정 시절부터 내려온 명망가 출신인 이유로, 큰 고초를 겪어 리보 프루기의 누이인 리키니아를 제외한 이들은 추방되거나 추방 이후 황제의 명령으로 자연사인양 암살되었다. 이때 이를 사주한 황제가 네르바와 [[하드리아누스]]인데, 트라야누스의 즉위 전후로 이들이 보호받았고, 트라야누스의 죽음 이후 이들이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으로 암살된 것은 훗날 원로원에서 하드리아누스의 신격화 반대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